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주 월성 (문단 편집) == 특징 == [[대명궁]], [[상경용천부]], [[평성궁]], [[경복궁]]처럼 커다란 정전을 중심으로 [[행각]]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두르고 주변에 소형, 중형, 대형 건물들을 규칙적이고 정렬하게 배치하며 이들을 행각으로 연결하는 통상적인 [[동아시아]] 궁궐 건축과는 다르게 대형 건물은 거의 없고 소형, 중형 건물들이 불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마다 각도가 따로 놀고 있고 위치가 자유분방하며 행각으로 보이는 흔적도 없어 궁궐보다는 마치 군사용 요새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신라]]가 삼국 중 가장 늦게 [[중앙집권제|중앙집권화]]를 이루었으므로 초기 [[삼국시대]]의 원시적인 궁궐이 먼저 이 언덕 위에 존재했을 것이고 그러고도 건국부터 망하는 그 순간까지 쭉 [[서라벌]]을 도읍으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작은 나라였던 [[사로국]] 시절부터 쭉 함께한 월성은 거대해진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나라의 시초부터 수백 년간 함께한 신성한 장소를 기와가 오래돼 교체해야 한답시고 녹유와나 황금 기와로 갈아 끼우거나 목재가 썩어간답시고 주칠단청을 칠하는 등 약간의 장식 추가와 수리가 있을지언정 마음대로 부수고 고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흥왕]]과 [[문무왕]] 시대를 거치며 신라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된 후 거기에 어울리게 궁궐을 크고 화려하게 짓고 싶어도, 주변에 [[동궁과 월지]], [[남궁]], [[북궁]] 같은 [[별궁]]을 더 만들어 넓이를 확장하지 기존에 있던 월성은 계속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문왕]]시절 [[대구광역시|대구]]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강력하게 반발해서 무산되고 [[9주 5소경]]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만약에 진짜로 대구로 천도했다면 [[자금성]] 같은 정갈한 궁궐이 지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옆에 있는 동궁과 월지는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만들었기 때문에 좀 더 정갈하고 세련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건물지 배치 형태를 보면 월성과는 다르게 소형, 중형 건물들이 정렬하게 같은 각도로 배치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2010년대 이후 추가 발굴된 동궁과 월지 동편 지역의 여러 유구들과 기타 여러 정황을 생각해보면 통일 이후 신라는 동궁을 단순히 동궁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닌 월성을 확장하는 개념으로서 축조한 정황들이 여럿 보인 것을 보아 월성은 확실히 건축물 자체의 수리는 있었을지언정 배치는 삼국시대 이후 크게 바뀐 부분이 없을 것으로 강하게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